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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서진희 이메일 newway919@gmail.com
작성일 2015-06-09 조회수 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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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중국 사이에 낀 한국의 길

 

미국과 중국 사이에 낀 한국의 길

미국의 중국 포위 전략과 한미동맹의 진로

 

이재봉 | pbpm@hanmail.net

 

 

 

이재봉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 교수)

 

 

한미관계가 애매해지고 있다. 미국의 중국 견제 및 포위 정책 때문이다.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자 한국 유일의 군사동맹인 미국은 서서히 쇠퇴하고 있고, 세계 2위의 강대국이자 한국 제 1의 무역상대인 중국은 급속하게 떠오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고 포위하기 위해 일본과의 동맹을 강화하며 그 안에 한국을 끌어들이려 하고 있으니, 한국은 미국과 군사동맹을 포기하기 어렵고 중국과 경제적으로 멀어질 수 없으며 일본과 껄끄러운 역사를 해결하기 곤란한 터에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느 나라든 대외정책의 가장 큰 목표는 국익을 최대화하는 것이다. 개인 간의 관계에서는 의리나 우정이 중요할지라도 국가 간의 관계에서는 이익이 최우선이란 뜻이다. 미국은 세계를 상대로 냉혹하리만큼 이익을 앞세우며 시대의 변화에 따라 대외정책을 전개해왔다. 그러나 한국은 국제관계를 개인관계의 연장으로 간주한 듯, 냉전시대에나 탈냉전시대에나 승공통일을 추구하든 평화통일을 추구하든, 미국과의 의리 또는 동맹관계에만 매달리며 대외정책을 구사해왔다.

 

미국과 중국 사이의 경쟁과 갈등이 앞으로 더욱 치열해질 텐데, 이에 한국은 어떠한 대외정책을 마련하는 게 바람직할까. 미국이 지금까지 중국에 대한 정책을 어떻게 변화시켜왔는지 알게 되면 바람직한 한미관계를 구상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크게 세 가지만 짚어본다.

 

첫째, 미국은 194910월 중국에 사회주의 정부가 수립되기 전부터 중국공산당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군이 중국에서 철수하자 장제스 (蔣介石)의 국민당과 마오쩌둥 (毛澤東)의 공산당 사이에 국공내전이 재개되었는데, 미국이 전쟁 초기엔 국민당을 전폭적으로 지원했지만, 1948년 말부터 공산당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국민당을 포기하고 공산당에 손을 내밀기 시작했던 것이다. 1947년부터 소련과 냉전을 본격적으로 벌여오던 터에 신생 중국이 소련 편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소련이 19497월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자 미국은 더욱 다급해졌다. 19501월 트루먼 대통령이 중국의 내전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며 대만에 관심 없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고, 곧 이어 애치슨 (Acheson) 국무부장관이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방어선에서 대만과 한반도를 빠뜨리는 내용의 선언을 발표한 배경이다. 애치슨 선언에 대해 많은 한국전쟁 연구자들은 미국이 북한의 남침을 유도한 것이라고 주장해왔지만, 중국공산당의 대만 침공을 눈감아주겠다는 유혹이었던 것이다. 중국이 소련과 동맹을 맺지 않으면 미국은 중국의 정부수립도 승인해주고 대만 공격에도 개입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19501월 말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남침을 지원하겠다는 전신을 보내고, 19502월 소련과 중국이 동맹조약을 맺자, 미국은 중국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대외정책을 바꿨다. 중국을 승인하고 소련을 봉쇄하려던 정책을 폐기하고, 일본과 동맹을 추진하여 소련 및 중국에 대한 봉쇄를 강화하면서 대만과 남한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정책을 채택한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중엔 소련과 연합해 일본과 싸우고, 일본이 항복한 뒤엔 소련과 냉전을 벌이면서 중국을 끌어들이기 위해 대만과 한반도를 포기했다가, 소련과 중국이 동맹을 맺자 적이었던 일본과 동맹을 맺고 대만과 남한을 붙잡는 미국 대외정책의 변화를 통해 우리는 무슨 교훈을 얻을까.

 

둘째, 미국은 1950-53년 한국전쟁 중 중국과 싸우면서 서로 원수가 되었다. 그러나 1953년 스탈린이 죽은 뒤 중국과 소련 사이에 갈등이 불거지기 시작해 1969년 두 나라 접경지역에서 두 번이나 무력충돌이 일어나는 등 중소분쟁이 치열해지자 미국은 다시 중국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소련을 견제하고 봉쇄하기 위해서였다. 19697월 한국전쟁 이래 실시해온 중국에 대한 여행 및 무역 제재를 해제하고 1970년 초부터 폴란드를 통해 은밀하게 대화의 장을 마련했다. 19705월 미국이 캄보디아를 침공하자 중국이 이를 거칠게 비판하면서 대화가 중단되었지만 미국은 포기하지 않았다. 19712월 닉슨 대통령이 중국과 대화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의회에 밝히고, 3월 중국에 대한 여행의 마지막 제재를 제거한 뒤, 7월에 키신저 (Kissinger) 국가안보 보좌관이 극비리에 중국을 방문했다. 그리고 8월 중국의 유엔 가입을 지지한 데 이어, 19722월엔 닉슨이 중국을 방문해 상하이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대만은 독립국이 아니라 중국의 일부로서 중국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이른바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냉전시대 미국의 대외정책을 한 마디로 평가하자면 반공인데, 소련을 견제하고 봉쇄하기 위해 자본주의 대만을 배신하고 사회주의 중국을 껴안게 되는 대외정책의 모순을 보여준 셈이랄까. 게다가 미국과 중국의 비밀협상 중 중국은 북한과 연락을 취하며 북한의 제안을 미국에 건네기도 했지만, 미국은 남한과 사전 협의는커녕 사후 통보도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는 점도 참고하기 바란다.

 

셋째, 미국은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냉전이 끝나자 소련 대신 중국을 미국의 패권에 도전할 수 있는 가장 심각한 국가로 간주하고 중국을 견제하며 봉쇄해왔다. 냉전 종식 이후 미국 대외정책의 목표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지위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경쟁국의 재등장을 막는 것인데, 중국을 새로운 경쟁국으로 삼은 것이다. 중국을 견제하며 봉쇄하는 핵심내용은 일본과의 군사동맹 강화다. 이에 따라 1990년대 중반부터 중국의 부상이 세계평화를 위협한다는 내용의 중국 위협론을 확산시키며, 19964월 일본과 안보 공동선언을 발표하고 19976월엔 기존 방위협력 지침의 수정을 검토하겠다고 발표하는 등 일본과의 군사동맹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미국과 중국 사이의 새로운 냉전이 시작되었다는 분석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미국은 또한 2000년대 중반부터 일본의 재무장을 막고 있는 평화헌법을 수정하여 정상국가또는 보통국가가 되도록 촉구하면서 일본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 진출하도록 지원해왔다. 일본 아베정권이 작년부터 전투력을 보유하지 않고 국가가 전쟁할 수 있는 권한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평화헌법 9를 수정하려는 움직임을 본격화하고 있는 것은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이미 10여 년 전부터 부추겨온 결과다. 나아가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4월 말 아베 총리를 초청해 정상회담을 갖고 일본을 지키는 데만 사용한다는 자위대를 나라 밖에서도 활동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새로운 .일 방위협력 지침을 공표했다. 194611월 승전국 미국이 패전국 일본에게 강요했던 평화헌법 9와 자위대의 성격이 미국의 중국 견제와 봉쇄 정책 때문에 약 70년이 흐른 뒤 완전히 변질되어 버린 것이다.

 

이렇듯 미국은 아시아로의 회귀 (pivot to Asia)’ 또는 재균형 (rebalancing) 전략을 내세우며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하기 위해 일본과 군사동맹을 강화함으로써 한국을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 심각한 위험으로 이끌 수도 있는 것이다. 먼저 군사적으로 미국의 요청에 따라 일본 병력이 한반도에도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게 되었다. 중국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을 핑계로 남한에 천문학적 경비가 들어갈 고고도 미사일 방어망 (THAAD)을 배치하려는 계획을 밀어붙이려고도 해왔다. 2008년부터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심각한 재정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2011예산 통제법 (Budget Control Act)’까지 만들어 10년 동안 거의 5,000억 달러에 이르는 국방비를 줄이기로 한 터에, 급속도로 성장하는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하기 위해서는 일본과 한국의 군사 경제적 동참과 협조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편, 한국 역시 냉전이 종식되자 1992년 중국과 국교를 정상화했다. 한국전쟁을 통해 40여 년간의 적대관계를 맺어온 사회주의 중국과 손을 맞잡은 것이다. 국익을 위해 비슷한 처지의 반공 자본주의 대만과의 40여년 우호관계까지 끊으면서 말이다. 중국의 급성장에 따라 한국과 중국의 교역량도 급속도로 커졌다. 한중 교역량이 2003570억 달러로 한일 교역량 536억 달러를 넘어섰다. 2004년엔 794억 달러로 한미 교역량 716억 달러를 초과했다. 2009년부터는 중국과의 교역량이 미국 및 일본과의 교역량을 합친 것보다 많아졌고, 미국과의 교역량보다 두 배 이상 커지기도 했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역의 내용이다. 2014년 중국으로부터 얻은 무역흑자가 553억 달러였는데 한국의 전체 무역흑자가 475억 달러였으니 중국 때문에 무역 적자를 면하는 셈이다. 무역 의존도가 몹시 높은 한국이 중국과의 무역 없이는 먹고살기 어렵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하기 위해 일본과의 군사동맹을 강화하며 한국까지 동참하라고 공개적이고 노골적으로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에 한국은 어떻게 할까. 잠시 우리 가정에서 벌어지는 낯익은 풍경을 떠올려보자. 어른들이 어린아이에게 아빠가 좋은지 엄마가 좋은지 짓궂은 질문을 던진다. 아이들은 대개 바람직한 선택을 한다. 둘 다 좋다고. 그러나 어른들은 냉전 논리에 세뇌된 탓인지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결국 아이들을 울리기 십상이다. 아빠와 엄마 가운데 한 쪽만 선택하라고 강요받는 아이의 입장이 요즘 미국과 중국 사이에 낀 한국의 처지 같다. 한국은 군사안보를 미국에 맡겨놓은 채 미국을 등지기 어렵고, 먹고사는 문제를 중국에 의존한 채 중국을 등지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어른들도 둘 다 선택하는 현명함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군사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미국과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중국 사이에서 어느 쪽에 줄을 서야 할지 고민하거나 눈치 보지 말고, 상황에 따라 미국 편을 드는 친미정책도 펴고 경우에 따라 중국 편을 드는 친중정책도 구사하면서 국익을 극대화하자는 뜻이다.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할수록 한국에 더욱 더 심각한 문제는 남북관계를 진전시키기 어렵다는 점이다. 미국은 북한을 적으로 삼아야 북한을 핑계로 주한미군을 유지하며 중국을 견제하기 쉽기 때문이다. 남북통일이 이루어지더라도 주한미군을 유지하겠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는 배경이다. 주한미군의 궁극적 목적이 북한의 남침을 막는 데 있지 않고 중국을 견제하는 데 있다는 뜻이다. 미국이 19537월의 한반도 정전협정을 아직도 종전협정이나 평화협정으로 바꾸지 못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정전협정이 종전협정이나 평화협정으로 바뀌면 주한미군을 유지할 수 있는 법적 명분이 약해지거나 사라지고,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중국을 견제하는 데 구멍이 뚫리기 때문이다. 북한이 무슨 명분으로든 불량국가로 남아 있어야 주한미군을 유지하며 남한을 무기수출 시장으로 지킬 수 있고 중국을 봉쇄하기 쉬운 것이다.

 

국제관계에서 진부할 정도로 흔하게 인용되는 격언이 있다. “국가 간의 관계에서는 영원한 우방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다. 영원한 것은 국가 이익뿐이다는 말이다. 한미동맹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이라는 목표를 추구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한미동맹이라는 수단을 강화함으로써 미국의 중국 견제 및 봉쇄에 말려들어 경제적 국익이라는 목적을 잃을 수도 있고, 일본군까지 한반도에 끌어들여 오히려 평화와 통일이라는 목표를 놓칠 수도 있다. 북한을 주적으로 삼고 냉전시대의 한미 군사동맹을 강화할 게 아니라,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추구하며 중국으로부터의 막대한 경제적 국익을 지키고 확대하기 위해,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약화해야 하지 않겠는가. 1950년대 중반부터 소련과 중국이 갈등과 분쟁을 벌이기 시작할 때 북한이 두 강대국 사이에서 국익을 추구하며 펼쳤던 양다리 외교나 남한이 노무현 정부 시절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시도하려던 동북아 균형자로서의 대외정책을 진지하게 검토해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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