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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서진희 이메일 newway919@gmail.com
작성일 2015-05-02 조회수 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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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틋했던 남북 관계, 이혼 위기까지 간 이유는…
 
 
애틋했던 남북 관계, 이혼 위기까지 간 이유는
역대 정부 남북 관계의 한계와 교훈
   
김근식 경남대학교 교수2015.05.01. 11:47:32
 
 
   
남북 관계는 '힘의 관계'라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지만, 탈냉전 이후 역대 정부의 남북 관계를 평가하는 것은 유의미하다. 각각의 한계와 교훈을 도출한다면 향후 현실 가능한 합리적인 남북 관계를 고민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김대중 정부 이후 남북 관계는 상당히 진전되었다. 정치적 대결과 군사적 대치라는 근본 한계는 변화되지 못했지만 과거 냉전 시대와는 다른 화해 협력의 남북 관계가 일정하게 형성됐다. 이어 노무현 정부까지 남북 관계는 한마디로 신혼부부 사이였다.

남북 간에는 설렘과 애틋함이 교차했다. 함께 어울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사이좋은 '이웃 사촌'처럼 지내고자 했다. 당시 평양을 십 수차례 다녀온 필자도 북쪽 사람을 만나면 항상 화기애애했고 저녁엔 술잔을 기울이며 민족의 동질성을 확인하곤 했다. 민족 화해가 증진되고 남북 관계가 개선되면서 이제 머잖아 통일의 길도 열릴 거라고 기대하기도 했다.

당시 남북 관계는 탈냉전 이후 적대적 대결 관계 대신 화해적 협력 관계가 가능할 것이라는 객관적 상황 변화에 힘입은 바가 컸다. 진영 간 대결이라는 냉전 체제가 와해되고 사회주의가 붕괴됐기 때문에 남쪽은 자신감을 갖고 북을 대할 수 있었고 북쪽은 남이 내민 화해 협력의 손을 쉽사리 거부하기 힘들었다. 탈냉전이 제공한 화해 협력의 객관적 토대는 남북의 상호 인정과 평화 공존 그리고 화해 협력이라는 새로운 남북 관계를 가능케 했고 이미 남북 기본 합의서 채택으로 남과 북은 새로운 관계 설정에 동의했다.


▲ 1998년 11월 18일 금강호 첫 출항 장면. ⓒ연합뉴스

김대중 정부는 평화 공존에 바탕한 화해 협력의 남북 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해 햇볕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했고 김정일 역시 권력 승계 과정과 고난의 행군을 지나면서 대내적 안정을 회복하고 남북 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갖게 되었다. 서로 상대방을 타도하거나 제거해야 할 필요성보다는 서로를 인정하고 교류 협력을 시작한다는 것에 대해 큰 거부감이 존재하지 않았다. 급기야 현대아산의 금강산 관광을 시작으로 남북 관계는 진전되기 시작했고 결국은 2000년 남북 정상 회담 성사로 남북은 과거와는 다른 전혀 새로운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6.15 공동 선언에 따라 김대중 정부는 대북 인도적 지원을 시작했고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과 철도 연결 등 3대 경협 사업을 추진했다. 정상 회담 이후 해마다 6.15 공동 행사는 평양에서, 8.15 공동 행사는 남쪽에서 개최되었고 대규모 민간 교류와 방북이 꾸준히 이어졌다. 북한의 '민족 공조'와 '우리 민족끼리'는 남북 화해를 정당화했고 김대중 정부의 햇볕 정책과 동포애는 교류 협력을 정당화했다. 남쪽에선 수십만 명이 금강산을 찾고 북쪽 사람과 대화하고 어울렸다. 북쪽도 남쪽 사람을 만나고 접하면서 친해지기 시작했다. 냉전 시대에 각인되고 형성되었던 상호 적대의식은 상당 부분 완화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신혼의 달콤함은 지속되지 못했다. 남북 관계는 다방면에서 진전됐지만 정작 대북 정책의 핵심 목표였던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햇볕 정책의 핵심 목표는 다방면에 걸친 남북 관계의 확대와 이를 통한 북한의 유의미한 변화 도출이었다. 그러나 남북은 연애 기분으로 잘 지내긴 했지만 상대가 그동안 살아온 익숙한 사고방식과 생활습관을 내 방식으로 바꾸는 데는 실패했다.

신혼의 남북 관계에서도 북핵 위기는 잠재되거나 지속됐고 결국 북은 핵실험을 하고 말았다. 또 신혼이지만 간헐적인 부부싸움도 벌어졌다. 1999년과 2002년의 서해교전은 군사적 충돌의 가능성이 상존함을 극적으로 입증했다. 냉전을 지나 탈냉전에 걸맞은 설렘의 신혼을 꿈꾸었지만 현실의 남북 관계는 결코 신혼부부나 이웃 사촌의 구조적 실현을 불가능하게 했다. 선의를 가지고 신혼처럼 잘 지내려고 했지만 결국 상대방의 본질이 그대로였다는 점에서 오히려 화해 협력 정책은 내부의 남남 갈등을 증폭시키는 정치적 후유증을 낳고 말았다. 화해 협력만으로는 우리가 원하는 바람직한 남북관계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남북 관계는 한마디로 이혼을 불사하는 남북 관계였다. 이웃사촌은커녕 원수 같은 남북 관계였다. 10년간 화해 협력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여론에 힘입어 보수 정부가 선택되었고 이명박 정부는 대북 정책의 교체를 정권 교체의 핵심과제로 간주했다. 지원하고 교류하고 협력하는 대북포용정책이 우리만 일방적으로 신혼의 감정에 빠진 것이지 정작 북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평가에 따라 이제 대북 정책은 강경과 봉쇄와 압박으로 전환되었다. 성미가 급한 우리 국민에게 10년은 기다릴 만큼 기다린 것이었고 이젠 채찍을 들 때가 된 것으로 여겨졌다.

김대중 노무현 시기의 화해 협력이라는 남북 관계가 냉전이 종식되고 탈냉전이 도래하면서 가능했다면 이명박 정부는 탈냉전의 남북 관계를 지나 재(再)냉전의 남북 대결로 회귀하고 말았다. 북핵 문제와 북한 도발이라는 한반도판 냉전이 온존하고 있었고 대북포용정책의 성공을 확신하지 못하는 보수적인 대북 의식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런 와중에 기존의 남북 관계는 하루아침에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박왕자 씨 피살사건으로 금강산 관광은 기약 없이 중단됐다. 북을 방문하고 북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던 접촉의 창구는 사라졌다. 대북 인도적 지원은 중단됐고 남북의 마지막 신뢰의 끈이 사라지면서 북한도 이명박 정부의 선심성 수해 물자 지원을 거부했다. 남측이 주지도 않지만 북도 받지 않겠다는 감정싸움이 심화되었다. 진행되던 남북 경협은 모두 중단되었고 사회문화 교류와 방북은 대폭 감소되거나 불허되었다.

감 정싸움은 결국 대형 충돌과 도발로 귀결됐고 천안함 사태와 연평도 포격으로 이제 남북 관계는 영영 신혼으로 돌아갈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고 말았다. 군사적 긴장은 최고조로 유지되었고 전쟁 일촉즉발의 위기가 지속되었다. 서해 바다는 팽팽히 당겨진 고무줄처럼 건드리기만 하면 끊어지는 형국을 유지했다.


▲ 북한의 해안포 공격으로 폐허가 된 연평도의 민간인 거주 지역. ⓒ해양경찰청

5.24 조치로 모든 경협과 대북 지원과 방북은 일체 금지되었다. 교류 협력의 남북 관계는 냉전 시대의 적대 관계로 돌아갔다. 한국 전쟁 이후 사상 최초의 영토 공격이 자행되자 남쪽의 대북인식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대북 지원을 중단하고 압박에 나선 남쪽에 대한 북쪽의 인식 역시 모욕감을 받았다는 감정과 함께 증오심을 키워 나갔다. 북에 진절머리는 내는 남쪽과, '역적 패당'과 '쥐박이'라고 남을 비난하는 북쪽의 신경전이 어이지면서 상호 적대의식과 대결 관계는 갈수록 심화되었다. 파국을 눈앞에 둔 사생결단의 남북 관계였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강대강 대결 정책은 어떤 성과도 내지 못했다. 남북 관계를 전면 중단하고 봉쇄와 압박으로 북한을 길들이려고 했지만 정작 돌아온 것은 북의 도발과 안보 위기 심화였다. 북한은 굴복하지도 변화하지도 고개 숙이지도 않았다. 주던 것을 끊었지만 북한이 고통스러워하거나 힘들어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우리의 대북 지렛대만 상실되고 말았다. 북은 천안함과 연평도로 군사적 도발을 확대했고 2차 핵실험으로 핵 능력을 더욱 키워나갔다. 북의 버릇을 고쳐놓겠다는 대북 강경 정책은 오히려 군사적 위기와 한반도 긴장 고조에 속수무책이었다.

교류 협력의 남북 관계가 충분한 성과를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었다면 대북 강경의 남북 관계는 애초부터 성공이 불가능한 외고집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대결과 강압의 파경기의 남북 관계로는 결코 북한을 제압할 수 없음을 확인하는 시기였다.

교류 협력만으로 소기의 성과를 낼 수 없었다면 교류 협력이 성공할 수 있는 노력과 조건들을 보완하고 고민해야 하는 것이지 교류 협력 자체를 파기하고 압박과 대결의 남북 관계로 전환하는 것은 더 큰 실패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으로 빠져드는 길이었다.

파경기의 이혼 부부 같은 남북 관계는 결코 성공하지 못하는 길이었다. 한반도에서 북을 따로 떼어 옮겨놓거나 제거하지 못하는 한 이혼을 불사하는 남북 관계는 최악의 한반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제 신혼도 이혼도 아닌 지속 가능한 남북 관계를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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