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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논문

이름 서진희 이메일 newway919@gmail.com
작성일 2015-03-23 조회수 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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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친미 매국세력 사드배치 찬성 鄭昭宋聾(정소송롱)
 
 
친미 매국세력 사드배치 찬성 鄭昭宋聾(정소송롱)
정나라는 시세에 밝으나 송나라는 귀머거리처럼 고집불통이다.
   
양산박 칼럼
   
 


鄭昭宋聾(정소송롱)
- 정나라는 시세에 밝으나 송나라는 귀머거리처럼 고집불통이다. -

미국을 천조국이나 수호천사처럼 여기고 있는 이 나라의 집정자들은 사드를 배치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기로 결심한 것 같다. 국방부 발표대로라면 전력이 2:11로 우세한 북한이 발사할 미사일을 요격하기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고 있으나 의식이 조금만 있는 사람이라면 사드배치는 미국을 겨냥한 중국의 대륙간 탄도탄을 조기에 요격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미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중국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한국이라는 위성국이 자신의 막대한 자금을 들여 미국무기를 사서 중국을 겨냥하려고 한다. 더욱이 한국은 현재 중국과의 교역 없이는 경제를 원만히 지탱할 수 없는 처지의 나라다. 연간 무역교역량은 미국와 일본을 합친 것보다 많고 연간 8백억 불의 무역흑자를 얻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명동거리나 제주도 및 유명한 관광지를 가득 메우고 있는 중국인 관광객 등은 현재 중국이 한국의 가장 중요한 교역대상국이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또 지구상에서 가장 호전적이고 위험한 북한을 현실적으로 통제할 힘과 경제력을 갖추고 있는 나라가 중국이다. 그런 중국에 대해 한국의 운명을 미국에 맡기고 중국을 적대국으로 돌려 경제파탄이나 분란을 기어코 일으켜 나라를 절단내려고 하는 목적이 단지 자신의 친척이나 가족이 유지하고 있는 영주권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한반도에 전쟁이 벌어지면 미국으로 달아나 계속 호의호식할 수 있다고 해서인가?

사대사관과 식민사관을 신봉하고 있는 한국의 강단사학자들 때문이지만 조선왕조 이후의 한국역사에는 전쟁이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다. 있다면 전쟁이 아니라 변란 정도다. 왜구와 여진족이 공연이 쳐들어와 조선에서 변란을 일으키고 심지어는 6.25도 북한도당이 일으킨 무장반란사건 쯤으로 왜곡시켜 사변이라고 호칭한다. 1592년 임진년에 일본의 침략으로 발생한 전쟁은 임진왜란이고 1627년 정묘년과 1636 병자년에 여진족이 세운 후금국의 침략으로 발생한 2차에 걸친 전쟁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며 1950년 발생한 전쟁은 6.25사변이다.

아마도 전쟁으로 표기했을 때 패전의 책임을 불가항력으로 돌리고 위정자들 자신은 그 책임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의도에서였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한국은 전쟁이 터져 나라가 쑥대밭이 되고 수십만 혹은 수백만의 민중이 목숨을 잃은 전쟁을 겪고도 교훈을 얻지 못하고 항상 그런 실수를 반복하여 나라를 불지옥으로 만들고 수백만에 달하는 민중의 목숨으로 댓가로 치뤘다.

임진왜란이라고 칭하는 조일전쟁의 전후처리가 그랬고 그나마 광해군의 국익차원의 중립외교도 천조국 명나라에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의리론을 내세운 매국노세력들에 의해 축출당하고 친명정책을 천명해서 바야흐로 떠오르는 태양처럼 강성해지고 있는 후금에 대해 노골적으로 도발했다. 그 결과 2차에 걸친 전쟁을 불러들이고 패전의 후속조치로 5만 명의 부녀자는 성노예로 50만의 민중은 노예로 청나라에 끌려갔다. 지금도 중국의 요녕성 심양시에 가면 당시 끌려갔단 조선족 수용소가 있었던 서탑(西塔)이라는 지명의 동네가 있다. 즐겨듣던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꼬에 나오는 ‘노예들이 합창’이라는 노래를 병자호란으로 끌려갔던 선조들의 일을 알고부터 듣지 않게 되었다. 광해군이 펼친 중립외교는 병자호란을 틀림없이 사전에 예방할 수 있었고 한걸음 더 나아가 정세를 보아가며 자발적으로 청나라에 편에 서서 청나라가 중국본토를 점령하게 되면 요동반도는 조선에 할양을 요구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조선의 위정자들은 헛된 명분론에 사로잡힌 정신병자들이었다.

6.25때 공산주의 침략으로부터 피를 흘려가며 우리나라를 지켜준 미국에게 그 은혜를 갚아야한다고 자국의 군대의 작전권을 미국에 맡기고 그것도 모자라 천문학적인 액수의 군사장비를 도입하여 한국의 가장 중요한 이웃이며 경제적인 이익을 얻고 있는 중국을 향해 겨누려는 새누리당을 본부로 하는 한국정부 대감들은 그들의 환생이다. 병자호란 당시 ‘나라는 망해도 다시 세울 수 있으나 의리란 영원불변한 진리임으로 설사 조선이 망하더라고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켜야 한다.’고 강변했던 김상헌을 위시한 조선시대 때의 소중화주의자들과 무엇이 다른가? 그리고 지금은 조선과 같은 왕조시대가 아니고 국민이 주인인 민주주의 체제의 국가다. 그때의 나라는 왕과 사대부들의 것이었지만 지금은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다. 무슨 권리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담보로 미국의 앞잡이가 되어 중국을 향해 도전장을 던져 나라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가려고 하는가? 경제가 파탄나서 제2의 국가부도사태가 나거나 또다시 한국 땅에서 전쟁이 나면 옛날 선조가 명나라로 도망치려고 했듯이 미국으로 비행기타고 도망치면 그만인가?

제목으로 쓴 성어의 전고는 춘추시대 때 이야기다. 삼년불비(三年不飛) 삼년불명(三年不鳴)이라는 성어로 유명한 춘추오패 중 초장왕이라고 있었다. 즉 ‘3년 동안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은 대붕이나 한번 날면 충천(衝天) 즉 하늘을 뚫고 한번 울면 세상들을 놀라게 한다!’라는 뜻이다. 당시 중국의 형세는 북쪽에 진문공 이래 중원의 패권을 차지했던 산서성 일대를 영토로 한 진(晉)나라가 있었고 남쪽에서는 초장왕의 통치에 힘입어 무섭게 세력을 확장시키고 있던 초나라가 있었다. 지금 국제정세로 보면 미국은 전통적인 패권국이었던 진나라에 해당하는 나라고 초나라는 새롭게 초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에 해당하는 나라다. 패자의 야심을 품고 있던 초장왕이 중원의 유력한 제후국인 정나라와 송나라에 사자를 보내 두 나라의 성향을 떠보려고 했다. 중원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정(鄭)나라와 송(宋)나라를 복속시켜 세력권에 편입시켜야 했기 때문이었다.

초나라의 압력을 받은 정나라와 송나라의 대처방법은 확연히 달랐다. 원래 상인 계층을 기층민으로 삼은 정나라는 시세에 밝아 초나라의 팽창정책에 유연하게 대했다. 그들은 진나라 군사가 쳐들어오면 곧바로 항복하고 충성을 맹세했고 진나라 군사가 물러간 후에 초나라 군사가 쳐들어오면 또다시 자신들이 진나라에 항복한 것은 힘이 없어 어쩔 수 없기 때문이라는 핑계를 대며 그때는 초나라에 충성을 맹세하곤 했다. 한 수 더 떠서 양 강대국 군대가 올 때마다 항복하는 의식도 번거롭다고 행각한 정나라는 진나라와 초나라를 오가며 두 나라의 싸움을 부추겼다. 진나라에 가서는 진나라가 초나라와 싸우면 자신들의 적극적으로 진나라를 돕겠다고 약속하고 다시 초나라에 가서는 초군을 돕겠다고 이간질 했다. 진초 두 나라는 중원의 패권을 놓고 필이라는 곳에 회전에 들어갔다. 싸움의 결과 초나라가 대승을 걷어 중원의 패권은 초나라로 돌어갔다. 정나라도 자연히 진나라의 압력에서 벗어나 초나라만을 섬길 수 있었다. 그래서 정나라는 시세에 밝다고 사서는 기록하고 있다.

송나라는 우리 한국인들과 같은 동이족 계열의 제후국이다.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하고 미자계라는 은나라 왕자를 하남성 동쪽 상구(商丘) 일대에 봉해 은나라 유민을 다스리게 했다. 고지직한 송나라 사람들을 빗댄 성어에 수주대토(守株待兎)와 송양지인(宋襄之仁)이 있다. 수주대토란 송나라 농부 한 사람이 어느 날 나무를 하기 위해 산에 올랐다가 나무기둥에 부딪쳐 죽은 토끼 한 마리를 주어 집으로 가져와서 배불리 먹은 후 부터는 계속 그 나무 곁에 앉아서 토끼를 기다렸다는 고지식한 사람 이야기다.

또 송양공은 춘추초기 송나라 군주다. 초나라와 홍수(泓水)에서 건곤일척의 전쟁을 수행 중에 인의(仁義) 정신에 투철한 송나라 군대는 정정당당하게 싸워야 한다며 여러 번의 요격 기회를 놓치고 결국은 송나라 군대는 대패하고 자신은 화살을 맞아 당한 부상으로 고생하다가 목숨을 잃은 군주다. 송양공이 홍수에서 패전한 해는 기원전 638년이다.

그리고 기원전 594년 패자의 꿈을 불태우고 있던 초장왕이 송나라의 분위기를 살피기 위해 사자를 제나라로 보낸다는 핑계로 고의로 송나라 경계를 지나가게 했다. 당시에도 제후국들은 사신을 보낼 때 3국의 영토를 경우하게 될 경우 사전에 통과증명서에 해당하는 가도문서를 발급하는 제도가 있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비자제도의 효시다. 초장왕은 신무외라는 신하를 제나라에 수호사절의 임무를 주어 가도문서 없이 송나라 경계를 통과하게 하여 송나라의 반응을 떠보려고 했다. 송나라가 가도문서없이 통과하는 초나라 사자를 그대로 통과시켜주면 송나라가 초나라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증거로 삼아 후에 송나라를 굴복시킬 수 있는 외교적인 정책수단의 근거로 삼으려고 했다. 그렇지 않고 초나라의 사자에 위해를 가한다면 송나라에 대한 군사행동을 취할 수 있는 명분으로 삼으려고 했다.

송나라 사자로 임명된 신무외가 초장왕에게 정나라는 시세에 밝은 나라라 큰 문제가 없으나 송나라는 귀머거리처럼 고집불통의 나라라 가도문서 없이 송나라 경계를 통과한다면 자신은 틀림없이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 후에 길을 떠났다. 과연 송나라는 신무외를 통과시켜 주지 않고 어차피 초나라의 침략을 막을 수 없다면 국가의 자존심이라고 지켜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초나라의 사자를 죽였다.

초나라는 즉시 대군을 일으켜 송나라로 진격했다. 당시 진나라는 현재 한국이 천조국처럼 받드는 미국처럼 송나라에게는 천조국이었다. 송나라는 즉시 사자를 천조국 진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초나라와의 싸움에서 자신이 없어 송나라를 구원하다가 패전이라도 당하는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취했던 진나라의 조치는 매우 악랄했다. 진나라는 해양이라는 사람을 사자로 파견하여 순진하고 시세에 밝지 못한 송나라 군민들에게 진나라가 군사를 징발하여 구원군을 일으키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니 송나라는 그때까지 송나라의 도성을 굳게 지키라는 친서를 전하게 했다. 해양의 말을 믿은 송나라는 결사적으로 초나라의 대군의 공격을 8개월을 막아냈다. 사서는 그때 송나라가 당한 재앙을 ‘易子爲食 骸骨為爨(역자위식 해골위찬)’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식량이 떨어진 군민들은 자기의 어린 자식들을 서로 바꿔서 잡아먹고 전사자들의 해골로 불을 때서 취사를 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진나라의 구원군은 오지 않았음으로 송나라는 결국 초나라에 항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정녕 21세기 한국의 대감들은 공산당의 마수로부터 우리 한국인들을 구해준 미국이 중국과의 분쟁으로 파탄 난 한국을 대신 구원해 줄 것이라고 먼 옛날 송나라 군민들처럼 철썩같이 믿고 있는 정신병자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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