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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논문

이름 박채순 박사 이메일 newway919@gmail.com
작성일 2013-05-27 조회수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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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 아르헨티나 군사독재의 상징, 비델라 사망 [박채순 박사, From 아르헨티나]
아디오스 비델라! 아르헨티나 군사독재의 상징, 비델라 사망
 
1976년 아르헨티나 후안 도밍고 페론 대통령의 미망인인 이사벨 페론 대통령을 강제로 축출하고 군사독재를 한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가, 2013 5 18일 복역 중이던 부에노스아이레스 소재 마르코 파스 감옥 독방에서 8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1976 3 24일 쿠데타를 주도한 데 이어 그 해 3 30 “아르헨티나 역사상 가장 어려운 시기에 들어 유일한 대안인 육군이 국정에 개입해야 한다고 발표 하면서 군사평의회를 통해 권좌에 올랐다. 그가 쿠데타를 한 1976년부터 1983년 민주화를 이룰 때까지 약 7년 동안에 시민사회 추정으로 3만 명, 공식적인 집계로 15,000명에 이르는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납치, 고문, 살인 등으로 사망했거나 행방불명 되었다.
 
그는 국민을 체포, 고문 국금하고 사살하고 시체를 유기하거나 강물에 버렸던 이른바 더러운 정쟁인 군사 독재 암흑시대의 주역이었다. 인접 군사 독재 국가들과 콘도르 플랜을 통해 군인들은 매일 밤 골목에서 시민들을 감시하고 체포하였으며, 이 만행을 인접국가까지 펼쳤던 역사상 가장 잔인한 공포의 시대를 연출했다.
 
더욱이 당시 군사 쿠데타에 저항한 젊은이들 중 임신부들이 집단 수용소에서 갓 낳은 신생아들을 권력을 가진 군인이나 경찰 등에 넘겨 불법으로 입양시켜버린 인륜에 반하는 유아 유괴까지 자행했다.
아르헨티나의 독재시대에 교회는 단지 그들의 수녀, 신부 그리고 주교 등이 연관되거나 살해되었을 때에만 목소리를 높혔을 뿐이며, 지식인들도 침묵으로 암묵적인 동조를 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프란시스코 교황이 선출되었을 때도 그의 추기경 시절의 침묵에 대해 시민사회에서 비판을 한 바도 있다.
 
당시 군인들은 전국에 364개의 비밀 장소를 만들어 놓고 만행을 저질렀다. 국민을 절차 없이 사형에 처하고,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하였으며, 국회를 3인의 군사 위원회로 대치하고 폐쇄했다.
 
1980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아돌포 페레스 에스키벨씨는 비델라의 사망에 즈음하여 매스컴과의 인터뷰에서 비델라는 아르헨티나 국민은 물론 인류에게 엄청난 상처를 주었다, 그의 사망으로 우리 사회가 더 나은 정의로운 국가가 되도록 계속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비델라는 범죄에 대해 세 번에 걸쳐서 무기형을 받았다. 첫 번째는 1983년 민주화를 이룬 2년 후인 1985년 알폰신 대통령시대에 군사 독재 시절의 범죄행위로 파면되고 무기형을 선고 받고 5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그러나 1990년 메넴정부에서 실시한 범법자에 대한 사면으로 일시적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었다. 1996년 인권단체들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그가 집권했던 시기에 벌린 유아 유괴에 대한 범죄로 1998년 다시 무기형을 주고 감옥에 보내졌다.
 
그렇지만 아르헨티나 법률에 의거 70세가 된 시점에 비록 외출 등은 금지되었으나, 본인의 주거에서 복역하도록 조치되었다. 2008년에 다시 주거 복역이 금지되고 다시 감옥으로 옮겨졌다.
 
2010년 키르치네르 정부에서는 메넴 정부 시절의 사면이 헌법에 위배된다고 판결하고, 또 다시 무기징역에 처해졌고 그가 시체로 발견되었던 부에노스아이레스 소재 마르코 파스의 감옥으로 이송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가 사망함으로써 남미에서 군사독재자들이 연합하여 실행했던 플랜 콘도르”, 수천의 행방불명 자 문제 등 당시의 많은 범죄가 미결 상태로 아르헨티나 국가 사회에 남게 되었다.  인권단체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5월 광장 어머니의 한 분인, 노라 꼬르띠냐 할머니는 언론 인터뷰에서 학살자가 죽었으나 우리가 밝히고자 하는 당시의 학살에 대한 비밀들이 묻히지 않기를 바란다고 강조한다.
 
사망할 때 까지도 그는 법정에서도 끝내 그의 인권 침해와 살인에 대해 전혀 잘못을 뉘우치지도 않고 대부분 묵비권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군인에게 주어진 모든 영예를 박탈당했고 그의 가족들에 의해 치러질 장례가 언제 치러지고 어디에 매장 될지에 대해서도 비밀에 부쳐졌다.
 
그의 사망은 비델라로 상징되는 군사 독재시대가 역사 속에서 막을 고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현재 아르헨티나 정치 상황을 비관적으로 보는 측에서는 과거사 청산이 아직 진행 중이라고 주장한다.
 
1983년 민주화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라울 알폰신 전 대통령의 교통 사고 후의 전국에서 국민들의 애태움과 그가 서거한 후 애도의 물결이 장사진을 이루었던 역사적인 사실들과 견주어 한 시대를 선량한 시민들을 공포에 몰아 넣고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했던 독재자의 감옥 속에서의 마지막 길이 극명하게 대조된다.     
 
얼마 전부터 전 키르츠네르와 그의 추종 세력인 “K” 기업인들이 키르츠네르와 연관하여 엄청난 외화를 돈 세탁을 통해서 외국으로 유출 시켰다고 폭로한, 언론인 호르헤 라나따씨는 일간지 끌라린 기고를 통해 비델라는 죽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에는 20세기 이후 오늘까지 이어진 권위주의 군사 문화가 아직도 살아있다. 비델라가 영원히 죽기까지 많은 물이 다리 밑을 통해서 흘러가야 한다고 한 독재자의 사망으로 모든 독재의 망령이 끝나지 않았음을 주장한다.
 
마침 한국에서 두 개로 나누어진 5.18 기념식에 대한 소식이 여기에도 전해진다. 또한 일부의 매스컴에서 광주항쟁에 북한군의 개입설을 주장하는 내용을 반영했다고도 한다.  5.18 당시 진압군에 참여했던 군인들과 현장에서 시민군으로 참여하거나 희생당한 분들 그리고 국내. 외의 수많은 언론인 등 생생한 증언들이 아직 살아 있어도, 어이없는 주장을 하고 그러한 논란이 존재한다. 이는 역사적인 진실과 그의 바로 세움이 인간사에서 얼마나 어려운 가를 뜻하는 것이리라
 
아르헨티나 크리스티나 정부과 친여 세력이 계획하고 실행하고자 하는 사법 민주화라는 이름의 사법부의 권한 축소 시도, 언론 자유 제한 조치, 권력자의 부정 부패 등에 대한 조치 미흡 등에 대해, 야당과 시민사회에서는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를 가지고 국가의 입법, 사법과 행정을 장악하고 권위주의로 복귀하고,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자 한다는 주장이 대치되고 있는 정치권의 현황이다.
 
군사 독재의 길을 열고 역사상 예가 없는 가혹한 폭정을 총 지휘했던 비델라의 감옥에서 죽음과 비밀리에 한 장례 절차 등 그의 마지막 길이 아르헨티나 사회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박채순 박사 From Argent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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