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안내


뉴스레터

이름 (사)대륙으로가는길 이메일 newway919@gmail.com
작성일 2014-03-26 조회수 996
파일첨부
제목
[전병관 이사장]뉴욕 중앙일보 인터뷰
온라인 비즈니스로 백화점에 주얼리 공급하는 전병관
 




브로드웨이 시절의 전병관
브로드웨이 시절의 전병관
 
시베리아 횡단 도중 바이칼 호수에 들른
시베리아 횡단 도중 바이칼 호수에 들른 '대륙으로 가는 길' 회원들. 뒷줄 왼쪽부터 네번째가 전병관. 중간줄 중앙에 정동영, 뉴욕의 임마철도 보인다.
 
뉴욕한인경제인협회장 이취임식. 왼쪽이 전병관 부부, 오른쪽은 전임 회장 서진형 부부.
뉴욕한인경제인협회장 이취임식. 왼쪽이 전병관 부부, 오른쪽은 전임 회장 서진형 부부.
 
경제인협회장 취임하며 '지식정보화' 모토로

2009년부터 우연한 계기에 통일문제에 관심

독립운동 유공자 선친은 대전 현충원에 안장




올해로 그의 비즈니스에 인터넷을 도입한지 만 9년을 맞은 전병관(63)은 온라인 비즈니스 덕에 비싼 렌트 물지 않고 뉴저지 팰리세이즈파크에서 여유있는 무역업을 하고 있다.



30분이면 닿을 수 있는 맨해튼의 고객들을 언제고 만날 수 있고 비즈니스 여행도 자주 하는 편이다.



당시 세태로 본다면 온라인 도입이 좀 늦은 감이 있지만 뉴욕한인경제인협회 멤버로서는 비교적 빠른 시기였다고 생각하고 그런대로 시작을 잘 했다고 생각한다.



맨해튼 브로드웨이의 높았던 렌트 압박감에서 벗어나서 좋고 온라인 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과정이 효율적이고 기존 서비스에 인터넷 부가가치가 붙어 마진도 좋다 보니 밝은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안도한다.



만난 사람 = 조종무 편집고문



그가 2005년 뉴욕한인경제인협회장(26대)에 취임하면서 모토로 내걸었던 게 바로 지식 정보화였다. 시대의 흐름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무언가 해야 되는데 당시로서는 기존의 오프라인 비즈니스에 온라인을 접목시켜 활성화시키자는 게 임기중 중점 사업이었다.



회장 자신이 앞장서 온라인 비즈니스로의 전환을 솔선하면서 전문가를 초빙해 세미나를 여러차례 열기도 했다. 이때 여러 회원들이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온라인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도중에 중단한 사람도 있었지만 몇몇 회원들은 그로인해 재미를 보기도 했고 지금은 상당수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시대의 흐름을 재빨리 파악하고 이를 실천에 옮긴 지혜라고 할수 있다.



이무렵 경협 회원 중에 탈 브로드웨이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브로드웨이의 높은 건물 임대가격이 부채질을 했지만 하나둘 뉴저지 쪽으로 이전하는 모습이 대세였다.



그가 취급하는 품목은 커스텀주얼리. 우리 말로는 모조 장신구. 여성용 목걸이 팔찌 귀걸이 같은 액세서리 제품들이다. 그의 비즈니스 형태는 한국과 중국에서 수입한 제품을 미국의 대형 소매 체인점 백화점에 공급하는 것이다.



백화점 거래가 전체의 96%를 차지하고 있는데 오더를 먼저 주는게 또한 특징이다. 받은 오더를 요즘에는 중국 공장 몇 군데에 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OEM) 시스템으로 나누어 준다.



중국 공장은 저장성에 있는 '이유'라는 도시로 항주에서 1시간 15분 정도 걸린다. 공장은 청도에도 있다.



그는 사업상 여행을 자주 한다. 한국을 비롯해 중국 동남아 등 미국으로부터 아웃소싱되는 지역에 관심을 둔다. 지난 8월에는 조금 다른 목적이었지만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몸을 싣기도 했다.



'대륙으로 가는 길'이란 단체의 일원으로 여럿이 함께 한 여행이었지만 그가 처음으로 접한 시베리아는 그야말로 큰 땅덩어리였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울창한 삼림 무궁무진한 자원 그중에 풍족한 석유 가스 목재 수자원들을 우리가 활용했으면 하는 애국심도 작동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 총 72시간이 걸린 철도 대륙횡단 여행 중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크 이르쿠츠크를 거쳐 도착한 바이칼 호수 주변 곳곳에 나타나는 샤머니즘을 보면서 그 옛날 우리 할머니들이 소중히 여기던 샤머니즘과 어찌 그리 똑같은지 역사의 기원을 의심할 정도였다.



춥고 척박한 땅으로만 알고있던 시베리아를 재발견하면서 그는 러시아의 자원을 한국이 활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남북통일을 앞당기는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여행을 통해 전병관은 많은 것을 배우고 깨우치고 또 우리 한민족이 앞으로 가야 할 길에 대한 확실한 신념이 생겼다고 했다.



여기서 한가지 밝혀둘 것은 정치나 이념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비즈니스에만 전념하던 그가 지난 2009년을 계기로 통일문제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까지 어렴풋이 그가 간직하고 있던 통일문제는 독립운동 유공자인 그의 선친(전경원)이 반쪽짜리 독립을 탐탁하게 생각지 않았던데 유래한다.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할때까지 가족에게도 밝히지 않았던 선친의 청년시절 독립운동 오사카 해군기지를 동료 3명과 함께 폭파하려던 계획이 탄로나 체포과정에서 고생도 많이 했고 일제 법정에 서게된 나머지 형을 살았던 공로로 군사정부 시절 독립유공자로 표창을 받으면서 가족들에게 했던 의미심장한 말 "내가 대한민국 광복을 위해 노력했지만 반쪽짜리 독립을 위해 한것은 아니었다"는 실토였다.



97년에 타계해 지금은 대전 현충원에 안장된 선친을 떠올리게 한 사건이 그해 워싱턴DC에서 있었다.



그때까지 전혀 인연이 없던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의 현실적인 통일방안과 개성공단에 대한 연설을 듣고 평소 자신이 생각했던 통일관과 공통분모를 찾으면서 가슴 한구석에 남아있던 선친의 통일에 대한 열망이 한꺼번에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정 장관과의 만남이 이어지고 민족의 장래에 대한 비전에 동의하면서 그는 2011년 미주에 설립된 한민족 경제비전연구소의 대표에 취임했다. 또한 정 전 장관의 소개로 그 해 한국에서 창설된 국회 산하 사단법인 '대륙으로 가는 길'의 해외 공동이사장도 맡게 되었다.



한편 경제인협회장 임기를 마치고 2007년 뉴욕한인회 이사장을 역임한 그는 당시 이세목 회장과 함께 일을 하면서 한국 태안반도 기름 유출 사건 때 동포 모금을 전개해 이를 전달했던 일 등이 기억나는 사건이었다. 가족으로는 부인(우상옥)과 1녀(예례) 1남(창섭)을 두었다.



그는 꿈은 꼭 이루어진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중.고등학교 시절(경북 사대부고)에도 연세대에 진학해 화학 공부를 하고 싶다는 조그만 꿈이 이루어졌고 그후 사회생활을 할 때도 해외건설 쪽에서 일하면서 미국에 진출해 무역업을 하고 싶다던 꿈 역시 이루어진 상태에서 앞으로의 계획은 4년 정도 더 비즈니스를 열심히 하고 은퇴하면 반은 미국서 생활하고 반은 한국에 나가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의 마지막 꿈은 우리 한민족 남북한을 포함해 전세계 750만 한민족을 위해 여생을 보내고 싶은 것. 구체적인 그림은 그리고 있는 중이지만 그 일을 위해 기회 닿는대로 탈북자 조선족들도 만나고 있다고 귀띰했다.
이전글 항일 무장투쟁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 흉상 제막식
다음글 [이종걸이사장]발의 공인인증서폐지법안 뒤늦게 이목집중